현실로 다가온 기후위기

기후위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도 어쩌면 10여 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기후위기라는 단어를 듣고 누군가는 아직도 빙하 위에 홀로 있는 북극곰부터 떠올리니까. 기후위기로 인류의 생존이 위협을 받는다는 암울한 경고가 나오는 지금, 북극곰 이미지는 “내 문제가 아니야”, “저 먼 곳의 일이야”라는 식으로 우리도 모르는 사이, 문제의 본질을 흐리게 만들었다.
우리의 시선이 ‘밖’이 아닌 ‘안’으로 향하게 하고 싶었다. 선언적이고 거대 담론 위주의 기후위기 보도에서 벗어나, 현재 우리가 두 발 딛고 서 있는 한국에서 벌어지는 사실에 집중해 〈라스트 포레스트〉, 〈라스트 씨〉시리즈 취재물을 기획한 이유다. 취재를 위해 이동한 거리는 7,860km. 서울과 부산을 20번 정도 오가는 동안 거리 곳곳에서 만난 지구의 생명은 하나같이 같은 말을 했다. 기후위기는 눈앞의 현실이라고, 이미 인간의 밥상 위에서 벌어지는 ‘당신의 일’이라고 말이다.
기후위기로 인해 하얗게 변한 사과

사라지는 생태계

우선 기후위기는 한국의 빨간 사과를 하얗게 만들었다. 지구온난화로 열대야 발생 빈도가 증가해 착색되지 않은 탓이다. 매끈해야 할 사과 껍질은 오돌토돌 튀어나왔다. 사과 꼭지는 누렇게 말라비틀어졌다. 잦아진 이상 기후로 인해 사과가 폭염에 타고, 서리에 얼고, 빗물에 젖은 흔적들이다. 과거 사과 주산지였던 영천, 대구, 경산 지역의 사과 재배 면적은 10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반면, 이제는 강원도 전역이 사과 재배 적합지로 분류되고 있다(농촌진흥청). 이대로라면 2100년 한반도에서 더 이상 사과를 찾아볼 수 없게 된다는 분석까지 나올 정도다.
겨울철 평균 온도가 올라가면서 수명이 늘어난 왕우렁이는 벼농사에 심각한 피해를 줬다. -3℃에서 사흘만 지속되도 살지 못하는 열대성 연체동물인 왕우렁이가 죽지 않고 겨울을 나기 시작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겨울철 평균 온도가 평년보다 1~2℃가량 높아진 고흥, 해남, 진도, 완도 등 전남 해안 지역 농가의 피해가 크다. 왕우렁이 두 마리가 벼 한 포기에 달라붙어서 전부 갉아먹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한 시간. “이젠 한겨울에도 뱀이 풀숲을 어슬렁거려요.” 고흥에서 18년간의 벼농사를 끝내 포기하고 올리브나무를 키우기 시작한 농부 주동일(65) 씨는 “교과서 내용을 바꿔야 한다.”라고 말했다.
등검은말벌로 인해 죽는 꿀벌
식물 생태계를 지탱하는 꿀벌은 떼로 죽은 채 발견되고 있다. 2003년 부산 영도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등검은말벌의 수가 최근 몇 년 사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면서다. 온화해진 날씨로 인해 아열대 특성을 가진 등검은말벌이 한국 땅에 적응했다. 이들은 꿀벌을 무차별적으로 낚아채며 사냥하기 시작했다. “꽃밭에서 꿀벌이 죽어가는 건 처음이었다.” 41년간 양봉업을 한 임철수(66) 씨가 말한 그대로였다. 여기에 이상 기후까지 겹치면서 부산, 경남, 전북 등지의 벌꿀 생산량을 예측하기 힘든 불규칙한 상황이 이어졌다. 한국의 등검은말벌 확산 속도는 다른 나라와 비교해 봐도 무척이나 빠르다. 유럽에서 등검은말벌로 인한 피해가 큰 나라는 프랑스다. 프랑스에서의 확산 속도는 12.4km/년. 그런데 한국에서는 확산 속도가 67.3km/년에 달한다. 프랑스보다 한국에서의 등검은말벌의 확산 속도가 5~6배가량 더 빠른 셈이다.
뿌리부터 가지 끝까지 하얗게 말라 버린 한라산 정상부의 구상나무

제주의 검은 그림자

제주도는 한반도 최남단에서 기후위기의 직격탄을 맞았다. 우선 지구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저지대 침수 문제가 심각해졌다. 해양수산부에 따르면 제주 조위관측소의 평균 해수면 높이(164.8cm)는 55년 전과 비교했을 때 23.4cm 높아졌다. 해마다 약 4~5mm씩 해수면 높이가 상승한 셈이다. 제주시의 동한두기 마을, 외도와 내도 일대가 대표적이다. 비가 오면 마을 내 67가구 중 20가구 정도가 매번 물에 잠긴다. 새로 집을 짓는 주민에게 침수에 대비해 집을 땅에서 50cm 높이 위에 지으라고 안내할 정도다.
차오르는 바닷물이 삶의 터전만 파괴하는 게 아니다. 생존에 필수적인 식수도 비상이다. 제주도 사람들의 ‘생명수’ 라고 할 수 있는 용천수가 사라지고 있다. 현존하는 용천수 656개소 중 17%인 111개소가 해수면 인근에 분포한다. 기후변화 시나리오(RCP) 8.5에 따라 한반도의 해수면 상승이 2050년 40cm에 이르게 되면, 용천수는 아예 바닷속에 잠기게 된다. 실제로 제주연구원이 6년 전 조사에서 확인했던 용천수 22개소는 침수로 인해 이미 사라진 상태다.
기후위기는 한라산 정상부까지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곳에 주로 분포하는 구상나무다. 우리나라 고유종인 구상나무는 한라산 해발 1,400m부터 분포하는데, 기후위기에 따른 이상 기후 여파로 뿌리부터 가지 끝까지 하얗게 말라가고 있었다. 숲의 푸른색이 회색 지대로 변한 이유다. 제주도 기온이 1℃씩 올라갈 때마다 제주도의 구상나무 서식지는 위로 150m씩 이동한다. 제주 세계자연유산센터 측은 제주도 지역의 기후 극한값(특정한 기후 현상 정도의 최대치)이 예전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치솟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상청은 불과 100여 년 만에 우리나라의 연평균기온이 1.6℃나 올랐다고 밝혔다. 같은 기간 지구 전체의 기온 상승 폭보다 두 배 더 크다. 우리나라에서 기후위기가 그만큼 빨리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 결과 100년 만에 한반도의 여름은 20일 정도 길어졌고, 겨울은 20일 정도 짧아졌다. 이런 상태로 지구온난화가 계속되면, 2080년 무렵 한반도의 여름은 여섯 달이나 되고, 겨울은 한 달로 줄어들게 된다. 기후위기, 더 이상 서식지를 잃은 북극곰을 설명하는 단어가 아니다. 이미 당신 인생의 이야기다.